부산지역 활터 유적 탐방 후기

입력 : 23.12.29 22:21|수정 : 23.12.29 22:21|국궁신문|댓글 2
부산진성 옛 활터를 시작으로 동래읍성 관덕정까지...

부산지역의 활터 유적 탐방 후기
부산진성 옛 활터를 시작으로 동래읍성 관덕정까지...
김기훈(서울 화랑정)
 
 부산 지역의 활터 유적에 관한 기사가 금년 초부터 국궁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한 이래 꼭 한번 그 현장을 답사하고 싶더니, 다행히 금년 해를 넘기기 전에 탐방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1박 2일의 짧은 시간이라 기장, 금정산성, 다대포 등지는 생략하고 부산진성과 좌수영, 동래읍성 지역만을 답사하였다. 지난 3년 동안 이 지역의 활터 유적을 꾸준히 조사해 온 이 선생의 안내 하에 그의 연구 과정과 성과를 듣고 보며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활터 유적은 그 어느 곳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왜란의 최초 격전지요 한국 전쟁의 최후 보루였던 국방의 도시 부산은 우리나라 어느 지역보다도 전화를 많이 겪었고, 따라서 변화 또한 극심한 지역이었다. 이런 역사를 떠 올리면 이 지역에 활터 유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 그다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라진 활터들이 이 선생이 보여 주는 자료와 그의 설명 곳곳에서 되살아 났다. 
 

[부산 동구 정공단]
 
 1592년 4월 14일 왜군이 처음 전투를 벌인 부산진성은 지금 정발 장군의 제단인 정공단이 있는 좌천동에 축성되어 있었으나, 왜군이 그 성의 뒷산인 증산에 부산 왜성을 쌓으면서 완전 파괴되었다. 증산의 정상부(아마도 왜성의 천수각이 있었음직한 곳) 누각에 올라보니 오른쪽으로는 영도로부터 왼쪽으로는 멀리 해운대까지 부산항이 완전히 조망되었다. 16세기 부산포를 드나들던 함선들의 동향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였다. 왜군은 증산 왜성의 왼쪽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구릉에 본성을 보조하는 자성을 축조하여 이를 자성대라고 불렀다. 임란이 끝난 후 조선 정부는 이 자성대 지역으로 부산진 군영을 옮겨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 부산진성의 자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한 때 자성대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그 명칭은 폐기되고 공식 명칭이 부산진성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임란 이후 일본과 외교가 재개되면서 조선 통신사를 태운 범선들이 출발하던 포구가 이 부산진성 밖 해안이었고, 해안 나지막한 구릉에 통신사가 잠시 대기하며 머물던 영가대라는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부산진성 내·외부의 주요 시설은 일제 강점기 이래 철도 부설, 시장 건립 등으로 인해 그 형체를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변형되어 있다. 1895년에 펴낸  『영남진지』 에 의하면 객사 옆에 무사들의 활쏘기를 시험하는 관덕정이 표기되어 있다. 다른 자료들과 연구 결과를 참조해 보면, 현재 부산진 시장 건물이 세워진 자리에 객사가 있었고, 따라서 관덕정 활터는 지금의 부산진 시장 앞 곧게 뻗은 범일로 상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 부산진의 활터는 불명이나 조선 후기 부산진의 활터는 그 개략적인 위치가 판명된 셈이다. 
  

[1757 여지도서-좌수영지도]
좌측 숲에 둘러싸인 곳이 장대(연무정)이고
수영성 위쪽에 어구정이 표기되어 있다
 
 부산진성의 관덕정 답사를 마친 후 답사팀이 향한 곳은 수영구에 있는 좌수영터이다. 울산에 육군 사령부인 좌병영이 있었다면, 수군 사령부인 좌수영은 이곳 수영에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좌수영에는 네 곳의 활터가 있었다. 좌수영 남쪽 5리 장대(將臺)에 연무정이 있었고, 좌수영 성내에 명후정, 남문 밖에 어구정과 청곡정이 있었다. 

 우리가 먼저 간 곳은 장대이다. 활터의 흔적이 있을법한 자리에 천주교 순교 성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장대는 공간이 넓어 무예 훈련 장소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종종 사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여지도서』 에 나오는 장대 그림을 보면 나무숲으로 둘러 싼 공간 속에 위쪽엔 연무정 정자가 있고. 아랫쪽엔 솔포가 솔대에 걸려 있다.   『조선의 궁술』 에 의하면  “지방에는 영·부·주·목의 소재지에 장대, 연무대, 관덕정 등의 비슷한 칭호를 가진 관설사장이 있어서 연병(練兵)·강무(講武) 이외에 장교와 군민이 습사하였나니,  『속대전』 은 이러한 강무·습사의 장소에 관할 지방관이 잡목을 심어 금화금벌(禁火禁伐: 화전과 벌목을 금지)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좌수영 장대의 공간 구조가  『조선의 궁술』 에 나오는 장대 구조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와 같은 장대의 구조를 참고해 보면, 현재 천주교 성지로 지정된 조그마한 언덕 위 평지는 솔포 과녁이 설치된 무겁터 자리쯤 되어 보인다. 장대골을 벗어나 좌수영성으로 와서 성안의 명후정, 성밖의 어구정, 청곡정 자리로 추정되는 지점들을 살펴보았다. 기록 외에는 어떤 유허나 유적도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답사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 졌다. 서둘러 첫째 날의 부산진성과 좌수영 답사를 마무리하였다. 

 이튿날 우리 답사팀은 1만 여 명의 왜병을 맞아 “싸우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며 결연히 맞선 동래부사 송상헌의 순절 현장인 동래부 읍성을 탐방하였다. 1592년 4월 15일, 그 전날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일본 왜병군단은 이번에는 동래성을 공격하였다. 동래부는 그 당시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독자적인 방어진지인 독진(獨鎭) 체제였다. 군민이 합세하여 하루 종일 격렬히 분전하였으나 역부족이라 마침내 송상헌 부사의 순절과 함께 동래읍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동래읍성 성길따라 옛 활터탐방]
 
 임진왜란 후에 이 동래 읍성은 조선 최고의 전방 요충지로 간주되어 성곽도 증축되고, 특수 기병 조직인 별기위 300명이 상설되는 등 군사 조직도 강화되었다. 동래성의 활터들은 이러한 군비 강화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 18세기 초엽에 동래 읍성 서문 밖에 읍승정(揖升亭) 활터가 세워지더니 얼마 후에는 부의 동쪽 성안 2리에 우빈정(耦賓亭)이 건립되었다. 나중에는 이 두 사정 즉 서부 사정인 읍승정과 동부 사정인 우빈정이 합쳐져 통합 사정이 되면서 이름을 읍우정(揖耦亭)이라 하고 성안 학소대(鶴巢臺: 학이 숲에 둥지를 튼 구릉) 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활소리, 총소리, 무사들의 함성소리가 너무 크다는 민원이 많아 마침내 무과시험장을 겸한 사정을 성 밖 휴산 언덕으로 옮겨 세웠다. 이 사정은 관덕정이라고 칭하였다가 나중에 녹양정이라는 이름의 사정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독립 사정이었다가 통합 사정이 되고, 성 안에 세웠다가 성 밖으로 이전하는 등 다소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동래 읍성에는 습사를 하고 각종 무예 시험을 치르던 공간인 활터는 항상 존재하였다. 이 곳에서도 활터들의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 사정들의 역사는 각종 기문(記文)과 절목(節目) 속에, 고지도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발굴하여 분석하고, 더 나아가 그 현장을 수 차례 방문하면서 끈질기게 위치를 추정해 온 이 선생의 노력이 있어 탐방팀은 하루만에 동래 읍성의 사라진 활터들을 대부분 답사해 볼 수 있었다. 특히 동문 밖에 있었던 관덕정의 위치는 지도 속에 그려진 팽나무 한 그루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실개천을 확인하면서 비정할 수 있었다는 이 선생의 ‘유레카‘적 경험담은 답사팀 모두를 감동시키기에 족하였다. 그 고목으로 지정된 팽나무 곁에는 현재 공공시설인 "1797년 팽나무 하우스”가 세워져 있어 다음에 탐방하는 이들의 뚜렷한 이정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1797 팽나무와 팽나무하우스]
 
 우리 일행은 짧은 여정이었지만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던 부산진성과 동래성 그리고 임란 당시에 전투는 없었지만 조선 수군 사령부였던 좌수영을 답사하면서 그 군영들마다 설립되어 있었던 주요 활터 자리를 개괄적으로 둘러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답사한 활터들은 현재 우리가 일상으로 접하고 있는 민간 활터가 아니고, 모두 조선시대의 관설 사정인 군영 활터였다. 

 부산광역시에는 지금 4개의 사정이 있다고 한다. 부침을 겪었던 이전의 사정들을 다 감안하여도 부산 사정의 역사는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면 부산 지역의 활의 역사와 문화는 한말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올 한해 내내 국궁신문에 연재되었던 그리고 우리가 이번에 답사한 활터와 그 문화는 누구의 역사와 문화란 말인가. 모두 부산의 활 역사요 문화가 아닌가. 그동안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활터 문화를 민간 활터의 문화와 그 역사만으로 한정지어 인식함으로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나라의 활문화 유산의 큰 부분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민간활터와 아울러 군영활터도 동시에 살펴보아야 우리나라 각 지역 활문화의 거대한 광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음을 재확인한 소중한 답사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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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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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winkidmo. 국궁신문입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국궁계에 전달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2024.03.11|archerynews
  • 너무도 아름다운 탐방후기입니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으로써 동래를 중심으로 하는 부산의 가치에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아울러 국궁이 사라지지 않도록 국궁 활성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도 필요해보입니다.
    초등학교에 방과후학습으로 국궁체험 교실을 운영하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국궁을 사랑하시는 분들이 힘을 모아 검토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2024.03.11|twinkid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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