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서울 화랑정)

  지난 주 토요일 (2023년 11월 25일) 오후 인왕산 자락 누상동 골짜기에 때 아닌 사물놀이 패의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고사상 앞에 부복한 백발의 궁사 주변에는 활꾼들이 청백홍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숙연하게 둘러서 있었다. 2023년 처음 열린 백호정 안전기원 행사다. 백호정 탁본 글자가 선명하게 보이는 깃대 아래 소박하게 차려진 고사상, 기원문을 낭독하는 축관의 굵직한 목소리, 누렇게 잘 익은 막걸리 한잔을 올리는 정성스러운 손. 오래 간만에 전통 활 문화의 살아있는 현장을 보는 듯하였다. 갑자기 모여든 인파에 놀란 백호정 돌바위 아랫집 주인이 슬며시 문을 열고 신기한 듯 쳐다보다가 한마디 한다. “내가 여기 산지 십 년 넘는데 한 번도 이런 행사가 없었어요.”

△ 백호정 각자석 앞에서 거행된 
최초의 “활쏘기 안전기원 행사”

  서울 종로구 누상동 옥인 3길 배화여자대학교 뒤편 담장에 이르면, 오른쪽 바위에 ‘白虎亭’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숙종 때 명필 엄한붕의 글씨다. 그 바위 밑에 약수터가 있다. 인왕산 호랑이기 많던 시절, 병든 호랑이 한 마리가 이 약수 물을 마신 후 원기를 회복하였다는 소문이 돌자, 전국의 환자들이 이 바위틈의 작은 샘물을 찾아 몰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백호정이라는 활터 이름이 이런 전설에서 유래하였다는 그럴듯한 설도 있을 만하다. 
 

△ 백호정(白虎亭) 각자석

  황학정의 종신 사두였던 성문영이 지은 「황학정기」(1929)에 의하면, 이 백호정은 임진왜란 후 선조가 경복궁 건춘문 안쪽에 건립한 오운정 이래 궁궐 밖에서 가장 먼저 창립된 민간 사정이다. 백호정은 나중에 사원들이 많아지면서 공간이 협소해지자, 순조 7년(1807) 한 붕이 그 곁에 있는 보다 넓은 공터를 찾아 풍소정이라는 새로운 활터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말과 일제시대의 신문 기사들을 보면 풍소정이라는 명칭은 거의 안 나오고 백호정이라는 명칭이 더 많이 등장한다.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초부터 백호정 (혹은 풍소정)의 명칭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백호정의 창정 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각자석이 세워진 시기가 창정 때인지, 한창 왕성하게 운영되던 중간 시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백호정 글씨를 남긴 엄한붕의 생몰연대 (1669~1759)로 볼 때, 이 각자석이 폐정될 때인 1807년에 세워진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백호정 글씨는 그가 완숙한 경지에 도달했을 때 부탁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저 글씨는 그의 50-60대 즉 1720-30년대, 백호정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 쓰여졌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 시절이다. 

  다산 정약용 (1762~1836)이 젊은 시절 남산 재산루 아래 누산정사에 머물렀던 때가 있었다. 이 무렵 「여름날 누산정사에서 지은 잡시 (夏日樓山雜詩)」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詩文集 第一卷)를 지어 누산정사에서 바라 본 재산루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정조 7년 (1783)의 일이다. 재산루는 효종 때의 재상 김육이 무사들을 위해 효종 7년 (1656) 경에 남산 회현 자락에 지은 활터였다. 
 

  활터의 ‘솔바람은 도리어 백호정보다 낫다오’라는 구절이 눈에 얼른 들어온다. 지금은 소나무 한 그루의 흔적도 없지만,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사진에는 각석 바위 정상에 소나무 한그루가 독야청청 서 있다. 정약용이 젊은 시절 보았던 백호정 주변은 소나무들이 많이 우거져 솔바람이 그리 유명했나 보다. 그러기에 남산 재산루 활터의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백호정의 솔바람을 떠올렸을 것이다. 

△ <누상동 백호정지> (동아일보, 1924. 7. 28 )

  본인 자신이 조선 최고의 명궁 중 한 사람이었던 정조 (1752-1800; 재위 1776-1800) 시절은 그야말로 활쏘기의 르네상스기였다. 활쏘기와 관련된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시대가 정조 시대이다. 활쏘기와 연관된 풍속화도 이 시절에 집중되어 있다. 김홍도의 「활쏘기」가 대표적이다. 이 그림에는 활터가 그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필자는 그림에 보이지 않는 그 활터가 바로 백호정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본다. 궁정의 화원이었던 김홍도가 정조 임금에게 민간의 활쏘기 교육과 습사 장면을 그려서 보여 드리려고 했을 때 어떤 활터를 찾아 갔을까. 한양에서 가장 유명하고, 궁궐에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활터, 곧 백호정이 아니었을까. 지금 국내의 대표적인 활터로 빈번하게 소개되고 미디어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정이 황학정이듯이 말이다. 

△ 김홍도의 「활쏘기」 (국립박물관 소장)

  백호정을 곧바로 언급한 풍속화 하나가 있다. 소나무 우거진 활터에서 앞으로 도약하며 육량전을 쏘는 모습과 이를 교육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화원의 이름과 그려진 시기는 모두 불명이나, 그 상황과 구도가 김홍도의 풍속화와 사뭇 닮아있다. 무엇보다도 그림에 실려 있는 화제(畫題)가 특별히 주목된다. 

△ 국가기록원 소장 「육량궁도」 [국궁신문(20-06-10)에서 재인용]

 

  “백호정의 활스승 (白虎亭弓師)”이란 구절을 통하여 이 그림은 백호정이 폐정되기 전인 정조 시절의 그림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그림을 그렸을 화원이 백호정을 배경으로 한 이유는 그만큼 백호정이 활쏘기 풍속화를 그리기에 여러 조건이 잘 갖추어졌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마치 김홍도가 그리하였던 것처럼.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백호정의 변화를 요약해 보면, 백호정은 최소한 영조 초기에 건립되어 있었고, 정조 시절에 한창 왕성하게 운영되다가, 그 공간이 협소하여 순조 초엽에 그 옆으로 옮겨 풍소정이라는 이름으로 확장한 활터가 된다. 어림잡아도 300년 전에는 존재하던 서울의 활터였고, 궁궐 밖에 세워진 최초의 민간 사정이었다. 

  이만한 역사와 의미를 지녔기에 오늘날 백호정이 그 삼백년 역사를 기리는 축제의 대상이 된 것이다. 각자석 앞에서 거행된 안전 기원제는 황학정에서 치러진 신입 궁사들의 집궁례와 과녁제, 그리고 안전 기원제를 마무리하고 길놀이를 하며 황학정으로 되돌아가 시행된 장안 편사와 아울러 ‘문화제 행사’라는 이름으로 거행되었다. 활쏘기를 단순히 기술을 익히고 겨루는 것만이 아니라, 음악과 예술이 겸비된 문화요, 굴곡과 변화가 있었던 역사의 과정으로 재탄생시킨 행사였다. 국궁이 시수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스포츠 활쏘기의 길로 나아감에 안타까워 하는 분들이 있다. 이제는 말로만 부족함을 지적할 것이 아니다. 넉넉한 전통 문화 요소를 찾아내고 그것을 구현함으로써 아쉬운 점을 보완하고 실천할 때가 되었다. 내년에도 국궁 문화의 풍성함을 만끽하는 이런 ‘문화제’행사가 다시 재현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