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궁문화유산, 경기도 양평 택승정기(澤升亭記)-②

입력 : 23.01.28 15:06|수정 : 23.01.28 15:06|국궁신문|댓글 0
활쏘기는 군왕의 법도요, 군자의 행실

국궁문화유산, 양평 택승정기(澤升亭記)-②
활쏘기는 군왕의 법도요, 군자의 행실
 
◇ 머리말 ◇
 택승정은 조선시대 남원 양씨 가문에서 세워 많은 무관을 배출한 활터이다. 지금은 과녁은 사라지고 정자만 남아있다. 정자 이름 ‘택승澤升’의 뜻을 요약하면 “활쏘기는 군왕의 법도요, 군자의 행실”이라는 말이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인 1,600년대 초부터 옛 경기도 지평현 광탄(廣灘. 너븐 여울)1)에 이주하여 살던 남원 양씨들은 인근 솔거리2) 들판에 활터를 세워 습사장習射場으로 쓰며 무예를 익혔다. 대를 이어 습사하던 이 활터에 순조 30년(1830)에야 비로소 사정射亭을 건립하여 활쏘기를 했다. 활터 이름 『택승정』은 사정을 세운지 10년 후인 헌종 6년(1840)에 후손인 양주태가 지었다. 이 글에서는 전 회에 이어 택승정기에 묻혀있는 스토리를 살펴본다. 
 
(택승정기. 택승정 안에 걸려있다.)
 
[국역]
◇ 택승정기澤升亭記 ◇
  활쏘기는 육예六藝3)의 하나이니 곧 무사武士의 일 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활쏘기는 덕을 살피는 것[觀德]이요, 향음주鄕飮酒4)는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밝히는 것이요, 천자에게 올리는 선비는 그들의 몸가짐을 시험하여 선발한다고 하였다. 문사文事와 무비武備를 겸비하여 한결같이 된 뒤라야 군자의 덕이 온전해지는 것이다. 지평현砥平縣의 북쪽 십 리의 광탄은 양씨梁氏의 누대 조상의 사당이 있는 고향이다. 양씨 가문은 대대로 무예를 업으로 하며 인간의 도리를 굳게 지키는 선비들과 국난을 당하여 순국하는 신하들이 때때로 나와 가문이 빛났고 줄곧 고을의 자랑이 되었다. 
 
 옛 절도사 양공梁公께서 정자를 택승이라 지어 편액扁額하였고 후손들이 수선하여 서까래가 지금도 새것 같다. 내가 품위 있는 선비들과 병신년丙申年 5월에 이 정자에 올라와서 살펴보니 정자는 4, 5 칸쯤 되고 마룻대와 추녀 끝은 아득하여 사방이 확 트이고 푸른 용마루와 모가 난 섬돌은 꿩이 나는 듯 새가 나는 듯하였다. 
 
 왼쪽은 한 길이요, 오른쪽은 평야이며 한 줄기의 맑은 시냇물이 그 아래로 둘러 돌아 흐르고, 아름다운 나무와 무성한 숲의 그늘과 그림자가 이리저리 어울려 뒤섞여졌으며, 푸른 나뭇가지가 주위 사방을 둘러친 가운데 수백보 눈이 닿는 데까지 넓고 평평하였다. 이곳에 원수元帥의 깃발을 세우고 삼군三軍5)의 군사가 갑옷과 투구를 진퇴 시킬 만 하니 진실로 이름에 걸 맞는 정자이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심연자心淵子가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정자의 이름이 활쏘기[射] 연관된 것은 그 실제적인 목적을 뜻한 것이니, 그대는 대대로 이어 온 장수將帥 가문의 후손으로서 재기才器가 출중하고 기절氣節이 뛰어나다. 어찌 활을 쏘아 백 보 앞의 버드나무 잎을 맞추고 바위를 뚫는 한 가지 재주만을 익혀 한 명의 적만을 대적하는 데 그쳐서 되겠는가. 
 
 무릇 장수가 되는 길은 천지 기미의 변화를 살피고, 풍운의 도략韜略을 간직하며, 진晉의 극지卻至 장군과 같이 시를 읊고 예를 논하며, 후한 광무제의 공신 정로장군征虜將軍 채준祭遵처럼 시경의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를 노래하고 투호投壺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자네가 해야 할 일이니 그대는 의당 힘써야 할 것이다. 
 
 정자의 이름에는 뜻이 있으니 못[澤]에서 활쏘기를 익히는 것은 선왕先王의 법도요, 읍하고 사양하고 오르고[升] 내리는 것은 군자의 행실이라는 의미로 택승澤升이라 한 것이다. 자손이 조상의 업을 이어받고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며 안으로는 뜻을 바르게 하고 밖으로 몸을 곧게 하며, 법도에 맞게 앞뒤로 움직이며, 절차에 따라 활을 쏜다면 군자의 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정자는 무인들만의 무예 연습장이란 말인가. 내가 반드시 해주고 싶은 말은 이 정자를 무예에 더하여 예와 악禮樂으로 꾸며야 한다는 것이다. 마침내 그 도리를 풀어 써서 연자淵子에게 주니 심연자心淵子는 누구인가. 전임 평해 태수 양군梁君 성환性煥이니 바로 절도공節度公의 아들이다.
 
병신년(1896) 5월 하순에 영가永嘉6) 김석규金錫圭7) 지음
 
 
 
[원문]
◇ 澤升亭記 ◇
射者는六藝之一이요非直爲武士事耳라是故禮曰射者는觀德이요鄕飮酒는所以明長幼也요獻貢은士所以試容禮也라文事의武備가交修不替以後에君子之德이全矣라砥平縣之北十里의廣灘은梁氏桐鄕也라梁氏世業이武하여秉執守從之士와臨難殉國之臣이往往而作 하고門欄炳爀一鄕矜式焉故節度梁公이扁之曰澤升이라하고宗族이嗣而葺之하니欀題가 至今維新이라余與諸君子有雅하야丙申榴夏에登是亭而覽之하니亭可四五間架而棟宇가縹緲하고軒櫳通暢하여翠甍方砌가如飛如革하고左因行하며右平原하고一道淸溪가縈回其下하고嘉木茂林이蔭影交錯하니柯色蒼翠하야周圍四面이요中地數百步다極目寬平하니可以建元帥旗하고進退는三軍之介冑하니儘名亭也라酒數行에心淵子要余作文記라余乃作而言曰亭以射名은志其實也라子以世將家人으로才器拔箤하고氣節卓榮하니豈止張弓挾矢하여穿楊擊石하여呈一藝하고敵一人哉리오夫爲將之道는察天地之機變하여藏風雲之韜略하여卻元帥之敦詩說禮하여祭證虜之雅歌投壺가是子之事也子其勉乎哉인저亭之名이有義歟이習射于澤은先王之法也요揖讓而升降은君子之行也라子其紹先業하여服聖訓하여正內志하고直外體하고旋中規하고舍發合度하여成君子之德이면豈不美哉아然則是亭也는靺韋之所哉아吾必曰飾之以禮樂也라遂識其說하여贈淵子하니心淵子는爲誰요前平海太守梁君性煥이니寔節度公之子也
丙申五月下澣 永嘉 金錫圭 識
 
 
 
◇ 택승정기 살펴보기 ◇

▲ 등장 인물 
 옛 절도사 양공梁公. 양주태梁柱台를 말하며 남원양씨 광탄종중 응자 행렬의 8대 후손으로 1837년(헌종 3) 식년式年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병마절도사(종2품, 亞將이라고도 부름)를 지냈다. 양성환梁性煥. 양주태의 아들로 음관蔭官이었으나 김석규와 교류하며 택승정기를 남겼고, 초대 광명의숙光明義塾8) 숙장塾長을 지내는 등 후손 양성을 위한 가문의 뜻을 실천하고자 힘썼다. 중앙관 경무사警務使 등을 지냈다.
 
▲ 시대적 배경
 택승정기 작성 년도는 1896년(병신년)으로 1894년 갑오경장 2년 후이다. 당시는 과거시험이 폐지되고 난 직후로서 활쏘기가 무예의 가치를 잃으며 큰 변화를 겪고 있을 시기였다. 이 변화의 시기에 기문에서는 활쏘기를 무예에 더하여 예와 악[禮樂]으로 꾸며야 한다고 했다. 장수의 길은 활 잘 쏘는 한 가지 재주에 그치지 말고 시를 읊고 예를 논하며 투호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과 폐지 후 양반들은 예의를 지켜 활을 즐기면서, 몸과 마음의 수련 장소로서 활터를 기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후손들에게 당부한 말과 습사정신
 기문에서 후손들에게 당부한 말은 ‘조상의 업인 활쏘기를 이어받아, 예의를 지켜 활터를 오르내리는 군자의 행실을 따르며, 안으로는 뜻을 바르게 하고 밖으로 몸을 곧게 하라’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택승정 표지석에 새겨진 ‘의(義)에 둔 습사정신(習射情神)’은 곧 ‘안으로는 뜻을 바르게 하고 밖으로 몸을 곧게 하라[正內志 直外體]는 것이다.’로 풀이 된다. 
 
▲ 택승정기 국역國譯
 택승정기를 우리말로 옮긴이는 역사학자로서 전통활쏘기를 연구하는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화랑정 김기훈님과 한학자漢學者인 군산 진남정 윤백일 고문님(파주의 유서 깊은 활터 금호정의 금호정기金虎亭記를 우리말로 옮김) 두 분의 도움을 받았다.    
 
▲ 전국에 정자만 남아 있는 활터
 우리나라에는 택승정과 같이 오랜 역사를 지닌 활터로서 정자만 남아있는 활터가 몇 군데 더 있다. 제주도 관덕정(제주목관아濟州牧官衙를 겸했음), 전북 정읍 고부古阜 군자정, 경기도 남한산성 이위정以威亭, 경북 의성 관덕정 등이다. 선조들이 호국 무예로 호연지기를 기르던 유적이지만 한량들의 발걸음이 끊어진지 오래되고 점차 잊혀지며 형해화形骸化 되어가고 있다. 이 중 정읍 고부 군자정과 남한산성 이위정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이미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여 발표하였다. 제주 관덕정은 보물로 지정되어 건물 관리는 잘 되고 있으나 본래 있던 활터는 없어지고 관광지로 변했다. 

 택승정은 양평군 향토유적 제25호이다. 누각 좌우편에는 남원 양씨 후손으로 어린 시절 택승정에서 활을 배운 병인양요丙寅洋擾의 영웅 양헌수 신도비神道碑9)와 효종孝宗이 치제문致祭文10)을 내린 양응함 신도비가 있다. 
 
(가운데 택승정, 우측 양헌수 신도비,
좌측 양응함 신도비 비각碑閣)
 
양희선(서울 화랑정)
maebong53@naver.com


【주석문】
1) 현 지명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이다.
2) 송구평松衢坪이라고도 부르며 소나무가 많은 네 거리에서 비롯된 말이다.
3) 육예六藝 : 예악사어서수 禮·樂·射·御·書·數
4) 향음주鄕飮酒는 주대周代에 향학鄕學에서 3년 동안 학업을 닦은 사람 중 우수한 사람을 임금에게 천거할 때 그를 송별하기 위하여 향대부鄕大夫가 베풀던 전별餞別의 연회. 온 고을 안의 유생이 모여서 읍양揖讓의 예를 지켜 술을 마시던 잔치
5) 삼군三軍은 대제후大諸侯가 가지는 군대
6) 영가永嘉는 안동의 옛 이름
7) 본관 안동으로 고종 때 주로 판사로 활동한 문신. 대한제국 법부 법무국장 등을 역임
8) 1815년(순조 16)에 광탄종중이 학계學契를 설립하고 전토田土를 구입하여 그 수입으로 서당書堂을 개설하였다. 자손 교육을 항구적으로 추진하니 헌수공憲洙公 어린 시절 동년배들이 수업하였다고 구전한다. 1913년 서당을 광명의숙光明義塾으로 개칭 확대하여 지역 학생을 교육하였다. 후에 지평사립학교, 지평공립보통학교, 용문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광탄종중에서 용문초등학교에 부지 8,000평을 희사하므로 용문초등학교 교문 옆에‘남원양씨대동회영세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9) 왕이나 종2품 이상 고관의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
10) 윗 사람이 제물祭物과 제문祭文을 내려 죽은 아랫 사람을 제사祭祀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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